3. 현대-대한민국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광복을 맞이했으나,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정책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어 동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1948년 대한민국(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된 후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이 수립되면서 남북이 분단되었다.
1950년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지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이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기반 시설은 대부분 초토화 되었다. 이후 195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으면서 전쟁의 참혹한 폐허의 상처를 딛고 복구해 나갔고 1960년대 이후에는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루며, 북조선의 경제 수준을 추월하는 등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변모하였다.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독재를 무너뜨린 최초의 혁명인 4.19혁명이 1960년 4월 19일에 전국에서 벌여졌다. 시위대는 3.15 부정 선거는 무효이므로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요구했고 이승만 정권은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무력으로 시위를 막으려 했던 이승만 정권은 시위가 진압되지 않자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1961-1979 박정희 정부와 유신체제 (한국의 산업화, 새마을 운동,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4.19혁명 후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윤보선이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민주주의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나라를 바로 잡겠다면서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군사 정변은 성공했고 이후 박정희는 2년 6개월 간 정치를 한다. 하지만 더 오랜 기간 동안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5대 대통령이 된다. 박정희는 다양한 경제 발전을 내놓으면서 대한민국을 발전시켰다. 이 덕분에 박정희는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후 박정희는 3선 개헌을 실시해서 대통령을 세 번까지 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어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법까지 바꿔 대통령을 세 번 한 박정희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더 오랫동안 대통령 자리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박정희는 1972년에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유신 헌법을 통과 시켰다. 유신은 낡은 제도를 새롭게 고친다는 뜻인데 유신 헌법의 내용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회의원과 법관을 임명할 수 있으며, 헌법조차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할 수 없게 해 놓고, 독재 정치를 펼친 것이다. 또한 자신이 계속 대통령을 할 수 있게 법을 바꾸어 놓았다. 유신 체제가 세워지자, 국민들의 분노는 치밀었고 결국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가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졌다고 해서 이를 ‘부마항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내부의 배신이었다. 중앙 정부 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정권 내부의 다툼으로 인한 불만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을 피살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중에 다양한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박정희 정부가 경제 성장에 매달린 이유는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해 많은 국민들이 굶주린 시대였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관심은 오직 잘 먹고 잘 사는 것. 또한,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정권을 차지한 탓에 박정희 정부는 경제 발전의 확실한 성과를 통해 국민들에게 인정받길 원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노동력은 풍부했지만, 시설과 기술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기본적인 산업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양의 자금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정부는 미국과 일본 같은 나라들과 약속을 하고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을 보내는 식으로 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1965년에 일본과 다시 국교를 맺고 한일 협정을 체결한 일이다. 이때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일본과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 발전 지원금을 마련하기 급급했던 정부는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 축하금 몇 억 달러에 모든 피해를 보상받은 셈 치기로 하는 굴욕적인 한일 협정을 맺었다. 이 한일 협정 체결 은 한일 관계에서 독도나 위안부 같은 다양한 문젯거리를 남겼다. 오늘날 일본 정부는 협정을 맺었으니 더 갚을 게 없다는 식의 뻔뻔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국군을 보냈다. 정보는 군대를 보내달라는 요청에 응하는 조건으로 미국에게 경제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밖에도 독일 지역에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견해 수익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노동력 수출을 통해 마련된 자금은 경제 발전 정책에 이용되었다. 처음에는 생활용품 위주의 단순한 제품들을 만들어 수출했고 점차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철강, 자동차, 선박 등을 수출했다. 또 박정희 정부는 경부 고속 국도를 비롯한 교통망을 확장했다.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는 새마을 운동도 이때 시작됐다. 그로 인해 빠른 시간 안에 대한민국의 국민 총생산량은 급격하게 늘어나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기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정식 대통령 당선 이후 1972년 10월 유신 이전까지는 절차상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지켜졌으나 1972년~1979년간은 민주주의가 모두 무너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60~70년대 한국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부정적 평가로는 유신독재 체제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인권을 탄압했다는 평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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