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5.18혁명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온 국민은 민주적인 정부를 원했지만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국군 보안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대한민국의 권력을 장악하려했다. 결국 전두환이 정권을 잡자 1980년 5월 15일 학생들은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광주 학생들도 전주환 정권에 반대해 5월 18일에 모여 시위를 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고 총을 쏴버렸다. 이 모습에 화가 난 광주 시민들은 함께 싸울 것을 결심하고 ‘시민군’부대를 만들었다. 시민군은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무기를 들고 전두환 정권에 대항했는데, 이때 전두환 세력은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북한에서 일어난 간첩 사건으로 보도해 다른 지역 주민들의 참여를 철저히 막았다. 시위대는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마지막 저항을 했지만 5.18민주화 운동 10일째인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기습 공격으로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전두환은 헌법을 바꿨고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 치룬 부정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1987년 6월 전두환의 강압적인 통치에 맞서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는데 그것이 6월 민주 항쟁이다.
1987년 6월 10일 6월 민주 항쟁
전두환은 겉으로는 정의롭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상은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국민의 요구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부정부패와 비리, 언론 통제,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은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나 정치적 반대 세력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의문의 죽임을 당한 것이다. 특히 부정 선거를 통해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한 전두환에 대해 국민이 직접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상황이었다.
이 무렵 민주화 운동을 한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박종철 군이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은 지 하루 만에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경찰은 책상을 ‘탁’하고 치자 박종철 군이 ‘억’하는 소리를 내며 죽은 거라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면서 사건의 진실을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박종철 군이 죽게 된 원인이 경찰의 고문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시민들은 죄 없는 대학생을 죽게 만들고, 사건을 덮으려고 한 전두환 정권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외쳤지만 전주환은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뽑는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간선제는 ‘간접 선거 제도’의 준 말로, 일반 선거인이 중간 선거인을 대표로 뽑아 그들로 하여금 선거를 치르도록 하는 제도) 국민들은 전두환 정권의 독재와 대통령 간선제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국적으로 모여 시위를 벌였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6월 10일 집회를 하루 앞두고 미리 각 대학 안에서 사전 집회를 준비했다. 이때 학교 밖으로 진출하려던 연세 대학교 학생들을 경찰이 거칠게 진압하면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들은 시민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어겼고, 그 과정에서 이한열 군이 뒤통수에 최루탄을 맞아 희생됐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한열 군과 그를 부축하는 친구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전 세계적으로 공개되면서 이 사건은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전국적으로 6.10 국민 대회가 시작되었다. 6.10 국민 대회를 막기 위해 지하철 운행을 중단하고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 장치를 제거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정부의 조치 덕에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넥타이 부대가 많았다. 넥타이 부대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도시에 있는 회사에 다니던 직장인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배운 것도 많았고, 사회에 대한 의식도 깨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넥타이 부대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6월 민주 항쟁에 참여했다.
그 결과 미국은 전두환 정권이 5.18 민주화 운동과 같은 비극을 다시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는 비극을 막기 위해 군대를 투입할 수 없도록 경고했다. 국민들의 불같은 저항에 전두환 정권 역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6월 29일 노태우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10월 27일 국민 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이 결정되었고, 대한민국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992년 문민정부의 출범
김영삼 대통령의 재임 시기를 ‘문민정부’라고 부른다. 최초로 군인 출신이 아닌 민간인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됐기 때문이다. 문민정부는 모든 금융 거래는 자신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금융 실명제와, 지역 대표를 지역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지방 자치제를 실시했다.
IMF 경제 위기와 극복
1997년에 일어난 IMF 경제 위기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많은 기업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늘어나는 등 경제가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정부와 국민들이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정부는 1997년 11월에 우리나라가 심각한 외환위기를 맞았다고 발표한 뒤 IMF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우리나라 경제가 위기에 처하자 국민들은 금을 모으기를 시작했다. 국민들이 내놓은 금을 정부와 기업이 사들여 외환과 바꾸는 식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금 모으기 운동’은 ‘제2의 국채 보상 운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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